기획 연재 : 금형인 명예의 전당 2
“400년 역사의 독일 금형기술을 우리는 30년 만에 따라 잡았습니다”- ②
40년 세월을 금형교육에 헌신해 온 류제구 교수의 70~80년대 이야기
故홍순철 학장과의 인연이 최초 4년제 금형학과 탄생시켜
“중앙직업훈련원에 치공구 설계 강의를 할 땐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홍순철 박사께서 절 보시곤 당신이 있는 경기공업전문대학으로 올 생각이 없냐는 거예요. 스카우트 제의를 하신 거죠. 그때 경기공전은 공업전문학교에서 공업전문대학으로 막 바뀌고 홍순철 박사께서 초대학장으로 오셨을 땝니다. 그렇게 해서 '79년 2월부터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그 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겁니다.”(경기공업전문대학은 이후 학교 명칭을 경기공업개방대학으로 한 차례 바꾼 뒤, 서울산업대학교를 거쳐 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다시 변경됐다.)
류 교수가 이때 경기공업전문대학으로 가 홍순철 학장과 만나지 않았다면 4년제 최초의 금형학과 설립은 어쩌면 한참 후의 일이 됐을지도 모른다. 류 교수는 틈만 나면 학장실로 찾아가 홍순철 학장을 꼬시기(?) 시작했다.
“커피 마시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틈만 나면 학장실로 간 겁니다. 그리고 금형에 대해 자꾸 얘기했지요. 학과를 만들어 달라고요. 그러다가 그게 '81년 1월이었나… 문교부에 들어갔다 오시더니 날 부르시지 뭡니까. 그리곤 대끔‘당신이 금형학과 만들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소. 책임자로 발령을 낼 테니까 그런 줄 아시오’이러시는 겁니다.”
사연은 이랬다. 당시 홍순철 학장은 교육부에서 국장과 실장까지 지낸 정통 교육부 출신이었다.
“당시 교육부에는 국(局)이 두 개밖에 없을 때입니다.
홍 학장은 그 두 개 국의 국장을 거쳐 기획관리실장까지 지내신 분인데, 그런 분이 금형과를 만들테니 허가를 내달라고 하는데 누가 반대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82년도부터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에 2년제로 시작했어요. 그러다 84년도에 4년제가 된 거죠“
류 교수의 회고처럼 1982년에 경기공업개방대학 기계공학과에 금형설계 전공 코스가 만들어졌고, 2년 뒤인 1983년에는 별도의 독립된 학과로 재탄생하면서 우리나라 금형교육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후 유한공업전문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서 금형관련 학과 개설이 봇물을 이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나라 금형사(金型史)를 다시 한 번 돌아보자. 한국금형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1980년대는 우리나라 금형산업의 성장기에 해당된다.
1981년부터 세계 최초로 금형 전문 전시회가 개최됐고, 1984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당시 경기공업개방대학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정규 금형설계학과가 개설되면서 각 교육기관에서 금형과를 개설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렇게 우수한 금형인력을 배출하면서 우리나라 금형산업이 근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의 성장 발달과 더불어 프레스 금형, 플라스틱 금형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대되면서 수많은 금형기업이 창업하게 되었다.
또한 방전가공기, NC기계 등 정밀가공기계가 일부 도입되기 시작했고, 금형의 종류도 반도체 금형, 전기·전자용품 금형, 기계류 부품용 금형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류제구 교수, 2010년‘제14회 금형의 날’에‘올해의 금형인’으로 선정 류제구(1945년 생) 서울과학기술대( 서울산업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2010년 11월 19일 국내 금형산업의 최대 축제인‘제14회 금형의 날’에‘올해의 금형인’으로 선정되는 명예를 안았다. 여의도 소재 63컨벤션센터(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이날 시상식에는 금형업계, 정부, 학계 등의 금형산업 관계자 약 600여명이 참석해 류제구 교수에게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 주요 경력 |
2006. 4. ~ 2009. 11. 한국금형공학회 초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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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다대포 간첩 사건과 뉴스 파노라마 방송 불발 사태
류제구 교수와 이하성 교수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시간을 거슬러 1983년 12월로 가보자.
당시만 해도 금형산업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나 정부의 지원은 형편없었다. 국민들에게 금형산업의 중요성을 알리고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내는 게 당시 금형업계의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누군가가‘방송을 이용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금형조합의 노력이 더해져 KBS에서 취재까지 하게 됐다. 그리고 12월 3일 KBS1 방송에서 저녁 9시 뉴스 파노라마 시간에 방송이 나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리는 듯 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류제구 교수의 증언이다.
“당시 조합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그때는 조합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사무실도 이곳저곳 옮겨 다니고 그럴 때였는데, 그 때 누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매스컴을 한 번 타보자고... 그래서 조합하고 KBS에서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당시에는 정식학과가 제가 있던 학교 밖에 없어서 취재도 해가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12월 3일로 방송 날짜가 잡혔는데… 하필 그때 다대포 무장간첩 사건이 터진 겁니다.”
북한의 무장간첩이 부산 다대포로 침투하다 발각된 이 사건으로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신문, 방송은 모두 이 사건을 다루느라 기사가 폭주했다. 어렵게 마련한 방송기회는 그렇게 간첩사건으로 허무하게 날아가고 말았다. 금형 조합 관계자는 물론 이하성 교수와 류제구 교수도 모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하지만 이 사건은 80년대 금형산업 발전에 또 다른 기회로 돌아온다는 걸 그때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 호에 계속)
글/방송작가. 김성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