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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금형인 명예의 전당 2] “400년 역사의 독일 금형기술을 우리는 30년 만에 따라 잡았습니다”- ① 40년 세월을 금형교육에 헌신해 온 류제구 교수의 70~80년대 이야기 이보람 기자입력2014-12-03 16:00:08

기획 연재 : 금형인 명예의 전당 2


“400년 역사의 독일 금형기술을 우리는 30년 만에 따라 잡았습니다”- ①
40년 세월을 금형교육에 헌신해 온 류제구 교수의 70~80년대 이야기


지난 10월 1일. 류제구 교수를 만나기 위해 필자가 찾은 곳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아니라 유한대학교였다.
2010년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정년퇴임한 류 교수는 지금도 유한대학교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4시간 씩 강의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2시간이 걸리는 제법 먼 거리를 노(老) 교수가 마다 않고 기꺼이 나서는 이유는 금형에 대한 애정이 아직 식지 않았다는 것과 유한대학교 이하성 교수와의 인연 때문이다. 먼저 이하성 교수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류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하자마자 저희 학교로 모셔와 강의를 부탁드렸습니다. 교수님은 경기공업개방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세계 최초로 4년제 정규 금형학과를 신설('84년 1월)하신 장본인이시고, 특히 한일 관계에서도 역할이 크셨던 선배 교수이십니다. 그런 분의 지식이 단절되는 게 안타까워 모시게 됐는데 학생들도 아주 좋아합니다. 강의 내용을 들어보면 경험에서 나오는‘진한 맛’이 있거든요.”
류제구 교수가 맡고 있는 강의는 이 교수의 설명처럼 오랜 경험이 필요한 과목이다. 류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제가 정년을 하고 난 뒤 서울과학기술대에서 학과 통합작업이 있었는데, 그때 아쉽게도 제가 만든 금형학과의 이름이 없어졌어요. … 많이 섭섭해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이 교수가 유한대로 오라고 몇 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2011년부터 지금까지 4년 째 방전가공하고 성형 연삭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 교수는“두 과목 모두 3, 4학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경험이 중요한 과목”이라고 덧붙였다.
과거 어느 땐가 류제구 교수는 이하성 교수에게 자신이 있던 서울과학기술대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 오라는 제안을 했었다. 하지만 이하성 교수는 유한대학교에 금형설계과를 직접 만든 당사자라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아끼고 존경하는 두 사람의 인연이 만들어 낸 작은 에피소드다.


군대에서 처음 접한 금형이 40년 금형 인생의 길 만들어

류제구 교수는 1968년 2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2월에 단국대학교 공과대학원에서 기계공학박사를 받았다.
중앙직업훈련원(1971.2~1979.1) 교수를 거쳐 경기공업개방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계설계학과(1979.2~1983.12),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제품설계금형공학과 1984.1~2010)까지 40년 세월을 금형교육에 헌신해 온 인물이다. 그가 금형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언제부터인지 궁금해졌다.
“제가 인하공대를 나왔는데 그땐 금형을 안 배웠어요. 과목도 없었고, 이름도 거의 없었어요. 1968년도에 대학 졸업을 하고 간부후보생, 그러니까 공군 정비장교로 군대생활을 할 때 처음 금형이란 단어를 만나게 된 거죠. 그때 자동차 테크니컬 매뉴얼을 보니까 제조과정에 금형이, 다이 앤 몰드가 자꾸 나타나요. 그래서 이게 뭐냐 싶어서 혼자 조사를 해 봤죠, 그랬는데‘아이고, 금형이 중요한 거구나!’그때 알게 된 거죠.”
1972년 전역을 한 류 교수는 인하공업전문대 자동차학과 강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이때 또 한 번 금형의 중요성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금형기술이 없어 망치로 철을 두드려 자동차를 만들던 나라가 아니었습니까? 기술을 배울 방법이 없는 거예요.
유럽에 있는 자동차부품 공장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공장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마다 함께 간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사출구멍이 오른쪽에 있었는지, 왼쪽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가며 퍼즐을 짜 맞추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150년 역사의 일본 금형기술,400년 역사의 독일 금형기술을 우리 금형업자들은 30년만에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중앙직업훈련원 거치면서 본격적인 금형교육자의 길 걸어

인하공전 자동차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류 교수는 어느 날 운명적으로‘금형인’의 길로 접어드는 첫 번째 계기를 만난다.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중앙직업훈련원에서 금형과 교수를 모집한다는 거예요. 이거다 싶어서 시험을 봤더니 합격이 된 거예요. 그래서 중앙직업훈련원에 가서 금형을 가르치기 시작한 거죠. 중앙직업훈련원에 금형공구과가 생
겼어요. 금형하고 공구는 형제에요. 기계하고 금형은 사촌이지만. 아무튼 그때서부터 금형공구 전문인을 만들어서 직업훈련 교사로 현장에 내보냈죠.”
1971년 4월 8일 개원한 중앙직업훈련원은 산업발전에 따른 기능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설립된 중추기관으로 각종 기계 및 설비가 완비된 당시로는 동양최대의 시설을 가진 훈련원이었다.
인천시 북구 구산동에서 열린 개원식에는 백두진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태동 보사부장관, 이승택 노동청장을 비롯해 주한외국공관장, NDP(국제연합개발계획), ILO(국제노동기구) 관계자들이 참석할 만큼 내외의 관심이 컸다.
당시 신문 기사를 살펴보자.


<(생략) … 지난 '66년부터 '71년 4월 현재까지 5개년에 걸쳐 완공 된 이 훈련원은 내자 5억 4천 4백만 원과 외자 68만 6천 달러를 들여 10만 5천 평의 대지 위에 기계, 자동차, 작업장 등 5천 3백 평의 건평과 각종 실습장을 마련, '71년부터 직업훈련교사 기능공 감독자훈련 통신훈련 등 총 4천 1백 40명의 인력을 배출하게 된다.
현재 중앙직업훈련원에서 기계 판금 용접 전기 전자 자동차 등 12개 직종에 7백20명이 훈련을 받고 있는데, 이들의 훈련비 전액은 국가에서 부담하고 있다.
이 훈련원에서는 생산 공장에서 요구하는 기술과 기능에 맞도록 이론보다는 실기에 중점을 두어 교육하게 된다.> (1971년 4월 8일자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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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8일 중앙직업훈련원 개원을 알리는 당시 매일경제신문 기사 내용. 1971년 2월부터 '79년 1월까지 8년간 몸담은 중앙직업훈련원에서의 경험은 류 교수를 한 차원 높
은 금형 교육자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1971년 2월부터 '79년 1월까지 만 8년간 몸담은 중앙직업훈련원에서의 경험은 류 교수를 한 차원 높은 금형교육자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1970년대, 그 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
- 진영정기, 국내 최초 방전가공기 개발에 성공
- 우리 공고생들 기능경기대회 프레스금형 종목에서 일본대표 꺾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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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교수가 중앙직업훈련원에 재직 중이던 1970년대에는 금형가공용 기계의 국산화가 절실하던 시절이다. 그 당시 국내 최초로 ㈜진영정기가 방전가공기 국산화에 성공한 것(1979년)이다. 금형조합 초대~2대 이사장을 지낸 진영정기 이용구 대표가 그 중심에 있었다. 과학기술처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박천경, 한송엽 교수와 공동으로 방전가공기 연구개발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금형제작의 필수장비인 방전가공기 국산 1호기의 개발은 금형가공용 기계 국산화의 길을 개척하는 시초였다.
또 지난 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시아게’정신이 없어 금형은 만들 수 없다고 말했던 한 재일교포 기업인의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고정관념을 깨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6년 9월 부산에서 전국 기능경기 대회가 개최됐다. 그런데 이때 일본에서 일본 국가대표선수(27명)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요청이 왔다. 물론 정식출전은 아니고 동일한 과제에 의한 동일한 조건 하에서 평가만 받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 대회준비위원이나 각 공업고등학교에서는 대환영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자신만만 했으며 한번 붙어보자는 의욕이 대단했다. 그래서 불붙는 경쟁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정밀기기제작 종목’인데 일본선수가 74.6점, 우리선수는 88.7점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시아게’정신이 없어 금형은 만들 수 없다던 바로 그‘프레스금형종목’에서 일본선수가 83.0점, 우리선수가 89.0점을 받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70년대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을 지내며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했던 오원철씨는 어느 글에선가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 때의 일로) 한국인은 정밀작업을 못하는 민족이다. 그래서 기계공업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오판은 완전히 불식됐다. 그 후 일본인은 이런 발언을 하는 이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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