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는 2017년 시즌 프로그램으로 신작 <에어콘 없는 방>(작 고영범, 연출 이성열)을 극단 백수광부와 공동제작해 오는 9월 14일(목)부터 10월 1일(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올린다.
2016년 제6회 벽산희곡상을 수상한 <에어콘 없는 방>(원제: 유신호텔 503호)의 주인공은 1906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한국, 상해, 미국을 떠돌며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었던 실존 인물 ‘피터 현(1906~1993)’이다.
그는 1919년 3·1 운동기 한국 독립운동을 상하이와 전 세계에 알린 현순 목사(玄楯, 1880~1968)의 아들이자 ‘박헌영의 첫 애인’, ‘한국판 마타하리’ 등으로 구설에 오르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평양에서 박헌영과 함께 처형된 앨리스 현(1903~1956)의 동생이다. <에어콘 없는 방>은 한 인물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가 경험한 파국이 낳은 다면적이고 경계적인 역사성과 정체성을 다룬다.
<에어콘 없는 방>의 극 중 배경은 1975년 8월 7일에서 8일로 넘어가는 단 하룻밤. 아버지 현순 목사가 건국공로자로 추서되고 국립묘지 안장행사를 치르기 위해 해방 이후 30년 만에 한국을 찾게 된 70살의 피터 현이 유신호텔 503호에 머문다.
방 안에는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 1936년 대공황을 맞은 뉴욕, 1945년 9월 미군의 남한 진주, 1945년 해방 후 혼란기 남한,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이 휩쓸던 미국, 1953년 6.25 휴전 협정이 한창인 한국, 1975년 극단적 유신 독재정권 하의 서울까지 폭넓은 현대사가 어지럽게 뒤엉키며 공존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뉴욕 연극계에 뛰어든 희망찬 젊은 피터와 굴곡진 현대사를 겪으며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늙고 초라한 피터가 도플갱어처럼 등장한다.
무대 위에는 에어콘조차 없어 답답한 열기로 가득한 좁은 방만이 존재한다. 그 방 안에 갇힌 피터 현의 80여년 인생과 함께한 개인의 지독한 고독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극적 역사의 경로만큼 쓰라린 개인적 불행과 실패의 연속에도 의지와 열정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피터 현과 달리, 그 방엔 어디에도 출구가 없다.
<에어콘 없는 방>에는 한국 현대사가 세계체제와 충돌하며 그의 인생에 드리워진 식민, 분단, 전쟁, 냉전의 역사가 펼쳐진다. 열기와 광염, 혼란과 분열로 가득했던 한 개인의 삶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적 울림은 우리가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역사의 진실과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에어콘 없는 방>은 그 시대를 겪었던 세대뿐만 아니라 2017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진지하고 뜨겁게 사유하게 할 것이다.
<에어콘 없는 방>을 집필한 고영범은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재미 극작가로 <태수는 왜?>로 정식 데뷔해 <이인실>, <방문>을 발표했다. 이번 작품에서 우리 연극사에 기록되진 않았으나 1930년 시빅 레퍼토리 극장(Civic Repertory Theatre)을 시작으로 십여 년간 미국에서 활동했던 연극 연출가 ‘피터 현’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조국을 떠나 이민자로서 연극 작업을 해온 작가 자신의 관심사와 맞 닿아 있다. 피터 현이 실제로 연출했었던 인형극 <황소 페르디난드(Ferdinand the Bull)>과 상영하지 못했던 아동극 <비버들의 봉기(Revolt of The Beavers)> 일부를 극중극 형태로 선보일 예정이다.
김옥란 연극평론가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신인 극작가로 데뷔했으나 오랫동안 훈련된 유연한 글쓰기와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와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한국현대사에 대한 예민한 촉수와 그것을 영상감각을 바탕으로 한 해체적인 장면과 날선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밝혔다.